SIHONG_critique

 




빛과 물의 흔적 / 서성록(미술평론가)

빛과물의흔적_혼합재료_162×37cm_2009

 

 고적한 담장풍경

홍승일은 1980년대와 90년대에 거푸집과 폐목을 이용한 웅장한 스케일의 설치작품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한가람 미술관 벽면에 붙인 20미터 가량의 공사판 패널작업, 그런가 하면 옛 미술회관에서 가졌던 폐목을 이용한 일명 '갯벌 작품'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는 단순히 폐품을 이용하는 것을 즐겼던 것은 아니다. 낡고 사그라진 물건들을 통해 물질사회의 이면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들었던 것 같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것들도 얼마든지 예술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기는 이런 모색은 어셈블리지나 아트 포베라에 비추어보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른 작가와 차이점이 있다면, 같은 재료라도 그에게 오면 표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는 재료를 다룰 때 섬세한 감각으로 조형화할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 언뜻 보면 허름한 것 같지만 엉성한 구조가 아니라 탄탄한 조형력이 그의 작품을 떠받치고 있다. 이것이 그를 지탱시켜온 요소가 아닌가 싶다. 홍승일은 자신의 남다른 조형감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재료들을 맛깔스럽게 다루어왔다.

홍승일의 시멘트 작업은 거무튀튀한 시멘트의 색조, 아무리 살랑거려도 까닥하지 않을 것 같은 육중함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물질의 표면과 움직임이 생각을 부르는 식이면, 감성이 물질에 다가와 깨우는 내용이다. 감성이 여전히 살아 있고, 환한 조명으로 후미진 곳을 뒤지듯 내밀한 조형력이 작품을 비춘다. 작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릴리프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입체 조형물이다. 먼저 릴리프 작품은 담장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창밖의 담장모습을 본 적이 있으리라. 그의 작품은 바로 그 때의 느낌을 전달한다. 고적(孤寂)한 담장의 풍경이다. 보다시피 작품은 잿빛의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다. 작가는 유채 대신 시멘트를 선택하여 평범한 담장의 표정을 그대로 옮겼다. 작업방법도 담벼락을 만들 때와 비슷하다. 틀을 만들어 시멘트를 바르고 평편하게 다듬기 위해 흙손으로 쳐대고 긁고 닦아내는 과정을 거친다. 작가는 거기에 세월의 흔적을 남긴다.

작가가 표면에 연동시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풍화'와 '침식'이다. 담벼락이 비바람에 못 이겨 균열이 나고 퇴색하며 침륜된 모습을 재연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풍경'을 담은 것 같지만 사실은 '시간'을 담은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 '그 시간에 얽힌 소회'를 담았다. 사물을 응시할 때 작가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흔들림을 감지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고즈넉한 풍경을 연상시키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담장 작품은 가을의 정취 같은 것을 풍긴다. 계절을 얽힌 감수성이 들어 있고, 대상을 대하는 시각이 감성적이다. 관조의 세계로 들어왔다고 할까, 그의 말을 빌면 '추운 겨울에서 따스한 봄날'로 접어들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10년 전에 '죽은 갯벌과 황폐한 영혼'을 테마로 개인전을 가졌을 때만 해도 그는 침울한 편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기르면서 행복을 알게 되었고, '관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서로 의지하며 기쁨을 함께 하고 어려움을 나눈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배우게 된 것이다. 시멘트를 이용해 상처 난 부위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어떤 부위는 도닥거리듯 덮어주고 가려주는 것도 이런 관용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시멘트 자체를 부정적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건물이나 시설을 보수할 때나 시골길 및 산책로의 낭만을 덮어버리는데 쓰이니 말이다, 작가는 그러한 '시멘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뿐히 날려 보낸다. 바람에 실려 온 이파리가 살포시 앉아 있는 풍경, 담벼락 너머로 새빨간 홍시가 달려있는 시골집의 옛 추억, 그리고 비오는 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통해 호젓함을 갖게 한다. 근래의 작품이 지난 것에 비해 훨씬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아마 인생의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홍승일의 근작은 마치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출발지점에 서 있는 육상선수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만큼 앞으로의 작업에 기대를 갖게 한다.

2008, 2009년 5, 6회 개인전 (토포 하우스, TJH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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